신우주설 제창자 논쟁
1598년, 오래간만에 편지를 보낸 매스 틀린 선생은 우르소의 책은 무가치한 표절 품이라고 충고했는데도 우르소와 엮이고 말았다고 케플러를 심하게 꾸짖었다. 우르소는 당시 튀코 체계를 누가 제창했느냐의 문제로 튀코와 싸우고 있었다. 우르소는 튀코와의 싸움에서 케플러를 인질 삼을 흑심을 품고 있었다. 케플러는 멋도 모르고 우르소에게 “가설이 마음에 듭니다”라는 편지를 보냈고, 우르소는 튀코와의 논쟁에서 자신의 우선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 저서 《천문학적 가설에 대하여》에서 케플러의 알랑거리는 편지들을 재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우르고는 튀코를 근거 없이 비난했고, 참다못한 튀코는 우르소의 책을 마구 찾아내 불태워버렸다. 그런 사정을 몰랐던 케플러는 순진하게 튀코에게 자신의 책을 보냈다. 튀코는 ‘남을 중상모략하는 범죄나 다름없는 책’에 자신의 편지가 이용당한 사실을 케플러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튀코 또한 케플러의 이론에 대해 다소 신랄하지만 이치에 맞는 비판을 시작으로 케플러와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반대자 중 한 명으로서 튀코는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부정확한 수치 자료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 편지들을 통해, 튀코와 케플러는 월면 현상에 대한 이야기 및 코페르니쿠스 설과 그 신학적 생존 가능성 등 광범위한 천문학 문제들을 토론했다. 그러나 튀코의 데이터보다 정확한 자료가 없었기에 케플러는 이 많은 쟁점을 제대로 다뤄 볼 방법이 없었다.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과 〈조화〉, 즉 음악과 수학과 물리학계의 수비학적 관계와 점성학적 중요성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1599년, 사용할 수 있는 자료들의 부정확함 때문에 케플러는 또다시 자기 연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관측 결과와 자기 이론이 맞지 않자 가설의 거창함에 빠져 있던 케플러가 내린 결론은 코페르니쿠스의 관측값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누구보다 정확한 관측 자료를 자랑하던 튀코를 만날 필요성을 절감했다.
연대학 :연표를 이용하여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을 배열하는 과학 학문, 천문학이나 역법 등을 이용하여 역사상의 사실에 대해 정확한 시간 또는 시간적 관계를 규명하는 학문.
수비학(영어: numerology) 또는 수비술 : 숫자와 사람, 장소, 사물, 문화 등의 사이에 숨겨진 의미와 연관성을 공부하는 학문
마침 같은 시기 주변 환경이 종교적으로 불안해진 것도 그라츠에서 케플러가 계속 일하는 것을 위협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라츠를 지배하던 대공은 가톨릭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권력 밖으로 밀려났다.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수입의 1할을 벌금으로 내거나 추방당해야 했다. 그해 12월, 튀코가 케플러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케플러는 튀코의 후원이 있다면 이 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케플러 자신의 사회적·경제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프라하로 출발했다.
프라하 (1600년~1612년)
튀코 브라헤와의 연구
튀코 브라헤의 흉상
1600년 4월 4일, 케플러는 튀코의 새 관측소가 세워지던, 프라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 프란츠 텡나겔과 롱고몬타누스를 만났다. 케플러는 두 달 이상 손님으로 머물렀고, 튀코의 화성 관측 일부를 분석했다. 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철저히 극비에 부쳤지만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동을 하여 곧 자료 입수를 허락했다. 케플러는 자기 저서 《우주 구조의 신비》의 이론을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에 기반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집에서 작업하기 위한 자료 복사본을 가져가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는 이후 2년의 시간이 걸린다. 요하네스 예세니우스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정규직을 얻기 위해 튀코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격한 싸움 끝에 깨지고, 4월 6일 케플러는 프라하로 가버렸다. 케플러와 튀코는 곧 화해하고 마침내 봉급과 주거 생활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6월, 케플러는 가족들을 데리러 그라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연구실의 튀코 브라헤
케플러와 튀코는 가깝지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튀코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튀코의 주변에는 늘 조수들, 아첨꾼들, 식객들로 북적거렸고 이들은 시골에서 온 촌뜨기 학자인 케플러를 놀려댔다. 튀코 역시 잠재적 경쟁자인 케플러에게 조금씩 볼 수 있도록 해줬을 뿐 쉽게 자료 전체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튀코는 케플러가 우르소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친한듯 친하지 않은 느낌이다.
그라츠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이 튀코에게 돌아가겠다는 케플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천문학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희망으로, 케플러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수학자로 임용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케플러는 달의 운동에 대한, 힘에 바탕을 둔 이론을 제안한 소론(《지구 안에 달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In Terra inest virtus, quae Lunam ciet)을 써서 페르디난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페르디난트 본인이 개신교도들의 추방에 앞장섰고, 케플러는 총 61명의 추방자 중 15번째로 추방당했다. 페르디난트 아래에서 일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이 소론은 월식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했다. 이 방법은 7월 10일 그라츠에서의 월식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관측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에서 완성한, 광학 법칙을 탐구하는 데에 기초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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